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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정리한 책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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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1-05-03 12:14 조회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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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알아야 병을 이긴다.
대인 공포 치료는 약물 요법과 행동, 심리 요법 등이 있으며 대개의 경우 이 모든 치료법을 병행해서 쓰고 있다. 물론 증례에 따라서는 어느 한 가지 요법이 특히 효과가 있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독자들이 혼자 할 수 있는 심리 요법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며 행동 기법도 포함되어 있다. 치료 기법은 대체로 치료가 진행되는 순으로 기술하였으나 반드시 여기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1.병을 알자
사람을 만나는 게 지옥 같다는 환자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환자를 더욱 답답하고 미치게 만드는 것은 이게 병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도 병인 줄 모르니 치료할 엄두도 물론 못 내본다. 평생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라. 이건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다. 더구나 그 당시만 해도 대인 공포에 대한 진단 개념도 없었거니와 나 역시 경험이 많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밀려오는 수많은 환자들을 위해 대인 공포 클리닉을 따로 개설하고 진료에 임했다. 지금처럼 특별한 치료 기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환자들은 큰 위안을 얻었다. 나로선 그 점이 몹시 궁금했다. 특별히 해준 것도 없는데 환자들의 고통은 크게 줄어든 것이다. 몇 차례 면담만으로 환자들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 세상 오직 나만의 문제, 누구와도 의논할 수 없고, 의논해야 소용없는 문제, 마치 자신의 숙명처럼 여겨왔던 문제였다. 병인 줄도 몰랐으니 병원에 올 생각은 물론 할 수 없었다. 이런 환자들이 ‘이건 병이다.’ 하는 말 한 마디로 크게 안심이 되고 치료가 급진전하게 된 것이다.

2.의사의 한 마디가 낳은 기적
한두 차례의 진단적 면담만으로도 환자의 치료는 급진전한다. 왜 일까? 첫째, ‘이런 고민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생각만으로 환자의 고만은 한결 가벼워진다. 나의 고통을 누군가가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다. 더구나 과학적인 태도로 자신의 고민을 정확히 진단,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는 의사가 자기 고만을 이해하고 들어 준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치료적 의미가 큰 것이다. 이 세상 누군가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제 그는 홀로 내팽개쳐진 외로운 사람은 이미 아닌 것이다. 실제로 대인 공포 환자는 세상에 나 혼자만이 이 문제로 고민하며, 또 나만이 이상한 사람이며 누구도 내 문제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고민해 온 것이다. 둘째, ‘나를 한 인간으로 받아 주는 사람이 있구나.’ 환자는 자기를 세상에 볼품없는 기형아로 생각하고 있다. 세상에 열등한 존재요, 내 신체에 큰 결함이 있는 기형아요,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죄인이다. 이렇게 못난 나를 아무 차별 없이 한 인간으로 이해하고 받아 준다는 것만으로도 환자는 한결 자신감이 생긴다. 누구도 나를 인간 취급 하지 않았다. 가족은 “까짓 걸 갖고!”라고 야단만 쳤다. 친구들은 못난 나를 경멸했고 버스 안의 사람들도 나를 기피하지 않았던가. 이제 의사가 나를 받아 줌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인간관계가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상실된 인간관계를 다시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며, 차츰 대인관계 범위도 확대되어 나간다. 셋째, ‘의사의 한 마디는 진지하고 성실하다.’ 의사는 괜찮다느니, 자신을 가지라는 등 값싼 동정이나 위로를 하지 않는다. 내 고민을 비웃거나 과소평가 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앞으로의 치료계획이나 소기의 치료목표 등을 현실성 있게 제시한다. 낙관도 비관도 아닌, 환자가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치료성과를 제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료하면 되겠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되고 그런 의사를 신뢰 할 수 있게 된다. 우선 환자를 안심시키느라고 그 정도 증상이면 문제없다느니, 완전히 장상이 된다느니 하는 등 과장된 치료 예측은 금물이다. 이 문제로 자살까지 생각해 온 환자에게는 믿기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안심을 시킨다는 것도 환자가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해야 치료자의 성실성을 신뢰받을 수 있게 된다.

3.이건 병이 아니다.
병이 아니라니? 병이니까 치료해야하고 또 치료가 된다고 큰소리치더니, 아니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래, 치료의 대상이 되는 점에선 병이다. 하지만 병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증상은 거의 모든 사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증상이 있다고 병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환자가 된다. 하지만 실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5% 내외밖에 안된다. 즉 증상이 있는 것만으로 병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상사 앞에 결재를 받아야 할 때, 시험관 앞에 면접을 할 때 안 떨리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있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이상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떨린다. 그렇다고 피해 달아나진 않는다. 떨리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으려니’하고 생각, 참고 견딘다. ‘떨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한다. 우리 환자는 여기서 다르다. 여느 사람과 같이 떨려도 ‘떨려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떨리는 건 실력이 없는 증거다. 고로 이건 병이다. 이건 이상이다. 이래선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병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증상인데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병을 만든다. 병이라고 생각하니 병이요, 이상이라 생각하니 이상이다. 이 생각이 하늘과 땅의 차이를 만든다. ‘떨릴 수도 있지’ 하고 시험을 치르는 사람과 ‘떨려선 안 된다’고 달아나는 환자의 차이다. 증상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다. 이건 마치 수도꼭지를 이리 틀면 더운 물, 저리 틀면 찬 물이 나오는 거나 같은 간단한 차이다. 하지만 그 차이는 한 인간에게 죽음까지 몰고 가는 엄청난 비극을 만든다.

4.소크라테스의 적면
소크라테스가 얼굴이 잘 붉어졌는지 혹은 음탕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어느 관상쟁이가 그는 음란기가 많은 상이라고 비난했다. 그 소리를 들은 제자가 흥분하여 선생에게 일렀다. “그건 사실이다. 다만 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 할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지극히 담담한 어조였다. 크게 개의치도 않았다. 적면이란, 이렇게 신 포도를 보면 침이 넘어가듯 자연스런 일이다. 이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 듯이 지극히 자연스런 인간의 감정이요, 표출이다. 마음에 드는 이성 앞에 얼굴이 붉어지고 침이 넘어가는 건 뭇 사내들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부끄러움, 수줍음, 성적 충동음란기의 발동이 빚는 생리적 반응인 것이다. 아직 그럴 사이는 아닌데 김칫국 마시듯 침이 넘어간다는 게 좀 미안할 수도 있다. 음탕한 마음을 먹고 있는 건 아닌가 상대가 ‘오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다. 점잖은 체면에 이게 무슨 꼴이람! 하지만 이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인걸. 죄라면 제가 예쁜 게 죄지 내 ‘남성’이 무슨 죄가 되며 창피랴. 남녀가 만나면 이런 성적 흥분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게 자연의 섭리다. 여기에 무슨 죄니 창피니 체면이냐 서로 그러려니 하고 짐짓 누르고 지나가는 게 남녀의 만남이다. 좀 어색하고 당혹스런 기분은 있다. 하지만 있는 게 당연하다. 그게 정상이요. 자연스런 일이다. 그걸 마치 나만이 갖는 문제인 것처럼, 아니면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비약하지 마라. 자신이 무슨 색한이요, 치한이나 되는 양 오해도 하지마라. 그 여자 마음인들 조용할까? 그냥 앙큼을 떨고 있을 뿐이다.

5.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라.
치료는 간단하다. ‘떨릴 수도 있겠지.’ 지금 이 순간 이렇게만 생각할 수 있다면 그로써 치료는 종결이다. 더 이상 병원에 와야 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이 한마디로 치료가 끝난 환자도 적지 않다. 이건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다. 이 한 마디를 되뇌면서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긴 환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너무나 간단명료하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원리를 내가 왜 생각을 못했을까? 왜 난 떨려선 안 된다는 생각만을 해왔을까? 하긴 떨릴 수도 있지 뭘 그래. 나도 그런 사람을 더러 보지 않았던가. 그래 떨릴 수고 있다. 떨릴 수도’ 어떤 환자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 간단한 생각을 못해서 오랜 세원 그렇게 고통을 당했나 싶다. 그래, 떨릴 수고 있고 붉어질 수도 있다. 표정이 어색할 수도 있고 시선이 좀 거북할 수도 있다. 정확히 23년간을 손 떨림 때문에 자살까지 생각했던 회사 중역은 이 말 한 마디를 되뇌면서 치료가 다 된 경우였다. “머리가 아주 획 돌아간 것 같습니다. 안 된다는 방향에서 된다는 방향으로 180⁰ 회전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 합니다. 참으로 간단합니다. 당장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이젠 여유도 생겼습니다. 떨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편하고 또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덜 떨리게 된 것도 신기한 소득입니다.”

6.의사 앞에선 왜 떨리지 않을까
“지금도 떨리고 불편합니까?”
“이상한데요, 안 떨리는데요. 선생님께 내가 얼마나 떨리는지 보여 드려야 되는데 이렇게 멀쩡하니 오진을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의사 앞에선 편하고 떨리지도 않을까요. 그것만 알면 치료가 끝납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열쇠가 있다. 치료에의 열쇠다. 이 원리만 이해할 수만 있다면 치료는 의외로 간단하다. 환자들은 병이라고 생각한다. 병인 이상 숨겨야 한다. 이 창피한 증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선 안 된다. 모든 방법을 다해 숨겨야 한다. 연기도 하고 안 그런 척 시치미도 뗀다. 이게 만약 드러나면 상대와의 인간과계는 끝장이다. 10년 아니 20년을 그렇게 숨겨 왔다. 숨기려니 조마조마하다. 행여 드러나면 어쩌나 마치 도둑질이나 하듯 아슬아슬하다. 어쩌면 상대가 눈치 챈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또 무를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죽을 맛이다. 아무리 잘 숨긴다 해도 그게 완벽할리가 없다. 연기를 하고 위장을 할수록 자꾸만 드러날 것 같은 초조감이 더해오고 그럴수록 ‘속마음’은 더 떨린다. 하지만 의사 앞에 앉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숨길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야 한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한데, 신기하게도 보이려고 할수록 더 안 된다. 전혀 떨리지도 않고 마음이 편하다. 왜냐하면 의사 앞에선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숨기려고 한 그 마음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도둑질 하듯 더욱 긴장되고 증상이 악화된 것이다. 치료의 열쇠는 간단하다. ‘숨기지 말자.’‘있는 대로 보여주자.’ 어디서 누구와 만나든 이 원칙만 지킬 수 있어도 치료는 종결이다.

7.누가누가 심하나
집단 치료 장면이다.
“멀쩡한 눈을 갖고 왜 그래요? 내 얼굴은 실제로 붉어지니까 남들이 알게 되니 문제죠.”
“그거야 자기만 불편하면 그만이지만 냄새를 풍겨 보세요. 주위 사람까지 불편하게 만드니.”
누구 문제가 제일 심하나 마치 시합이나 하는 것 같다. 저마다 자기 문제가 제일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런 문제라면 걱정도 않겠다고 하면서 남의 문제는 아예 웃어넘긴다. 그러면 과연 누가 제일 심한가? 그러나 이 판정을 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환자는 저마다 주관적으로 판단해서 제일 심각하다. 따라서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주관적 판단이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치료 상 중요하다. 모든 신체질환의 진단에는 객관적 기준이 분명히 있다. 혈액, 소변, 방사선 검사 등 결과에 따라 병을 진단한다. 그 정도에 따라 경증, 중증도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대인공포는 불행히 그런 객관적 기준이 없다. 이건 전적으로 환자 스스로의 주관적 판단이다. 내가 심하다니까 심한 것이다. 객관적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작 내 마음 먹기다. 객관적으로 넌 얼굴이 그만큼 붉어 졌으니 병이라고 하는 기준이 없다. 덜 붉어져도(거의 표가 안 나도) 내가 병이라고 생각하면 병이다. 고로 이 병은 내 마음 먹기에 따라 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별 문제가 안 되는 걸 왜 내가 이렇게 고민해야 할까? 치료의 열쇠는 여기에도 있다. 남들이 내 고민을 듣고 오히려 웃기까지 하는 문제라면 별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면 치료는 상당히 진전되고 있다는 증거다.

8.적면이 창피라니
얼굴이 붉어질 수도 있고 떨릴 수도 있다. 숨기려 하지 말고 있는 대로 보여라. 말이야 쉽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마음먹기란 쉽지 않다. 하긴 그리 쉽게 마음대로 된다면 이 책을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마음만 먹을 수 있다면 치료는 간단하다. 그런데도 왜 안 되느냐? 환자들은 적면을 창피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떨리고 어색한 것을 창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게 자랑이 아니고 창피한 일이라면 그대로 남에게 보여선 안 될 일이다. 상대가 나의 그런 모습을 보면 무시하고 경멸할 것이다. 자신이 없어 저럴 것이다. 무슨 나쁜 짓을 했나 보다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할 게 뻔하다.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열등감, 패배감까지 들 수 있다. 그런 적면을 보이다니 말도 안 될 소리다. 문제는 여기다. 적면이 과연 그렇게 창피한 일인가? 왜 환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이 점을 잘 생각해 봐야 문제의 실마리가 풀린다. 수줍고 좀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진다. 이를 환자들은 거꾸로 생각한다. 적면하니까 창피하다는 것이다. 이건 오해다. 앞뒤가 바뀐 모순이요, 의식의 왜곡이다. 수줍으니까 붉어지는 것이지 붉어지니까 창피한 건 아니다. 마음에 드는 이성 앞에 누가 얼굴이 붉어지지 않으랴. 참으로 아름답고 순수한 감정이다. 도대체 이게 왜 창피하다는 거냐? 상사 앞에서 조심스러워 떨리는데 이게 어찌 창피란 말이냐.

9.발그레한 얼굴의 매력
누가 이 아가씨를 싫어하랴. 수줍어서 발그레한 얼굴로 다소곳이 고개 숙인 여자. 차마 잘 쳐다도 못 보는 여자. 세상 어느 남자가 이런 여자를 싫어하랴. 하긴 요즘엔 톡톡 튀는 아가씨도 인기다. 자기주장이 분명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도 없진 않다. 하지만 아직도 선 보는 자리에선 빼물고 앉아 얌전빼는 여자가 더 많다. 남자는 순종적이고 부끄럼 많은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인물도 괜찮고 집안도 좋은 아가씨가 선만 보면 퇴짜를 맞곤 했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 여자가 너무 시건방지다는 게 흠이었다. 실인즉 이 아가씨는 병명부터가 말괄량이였다. 밝고 명랑한 것은 좋으나 그게 처음 보는 남자에겐 경박하고, 심지어 위협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내숭을 떨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 정도 연기는 헐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수줍어 발그레한 얼굴을 지어 보일 수는 없었다. 적면공포 환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어느 말괄량이의 고민이다. 요즈음 세상에 춘향이 같은 색시를 찾는 남자가 어디 있어? 물론 이런 반론도 성립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서구화 되면서 이런 아름다운 수줍음이 가시고 있는 건 사실이다. 못내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도 수줍은 적면은 아름다운 매력이라는 점이다. 특히 여자에겐.

10.상사는 숫내기 부하를 좋아한다.
한국 문화권에선 좀 떨리고 붉어지는 게 매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여자 입장에선! 하지만 남자가 그래서야 사람들이 뭐랄 것인가? 저래서야 어디 가서 밥 빌어먹기라도 하겠나, 경멸하고 조소할 것이다. 사내라면 좀 당당하고 의젓해야지. 벌벌 떨면서 말 한 마디 변변히 못한대서야 남자 구실 옳게 하기란 글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물론 있다. 당당하고 사교적이며 적극적인 사람이 남성답고 인기가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 말 한 마디하려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숫내기에게 신뢰감이 더 갈 수도 있다. 진지하고 성실하다. 물론 거짓말도 못 한다. 생각만 해도 홍당무가 될 판인데 어디라고 감히. 참으로 순진한 인상을 준다. 그런 사람을 더 신뢰한다. 그뿐 아니다. 상사 앞에선 좀 떨려야 한다. 그만큼 상사를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존경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하를 싫어할 턱이 없다. 물론 당당한 부하도 쓸모가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자칫 건방지다거나 거만한 인상을 줄 수도 있고 상사로선 다루기가 부담스럽다. 이의를 달거나 반박이라도 하며 덤빌 것도 같다. 이런 부하를 곁에 두고 쓰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숫내기는 순종적이요, 충성스럽다. 웬만한 상사라면 이런 숫내기를 좋아한다. 이런 자세가 상사의 권위를 세워 주고 우쭐한 기분을 갖게 한다. 자아 영양제로서도 기분 좋다.(비밀이지만, 시원찮은 상사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리고 대개의 상사들은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숫내기가 인정받고 성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11.자기 증상을 매력 포인트로
연지 곤지 찍고, 이건 예날 색시만이 아니다. 요즈음도 여자 화장의 기본은 얼굴을 발그스레 하는 일이다. 이게 매력으로 보이니까 예나 지금이나 붉은색 화장을 하는 거겠지. 홍조 띤 얼굴,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미의 기본이다. 순진하고 수줍은 모습을 부여주기 위함이다. 거기다 건강미까지. 그런 여자가 아름답다. 얼굴이 잘 붉어지는 여자가 있다. 사람을 만나면 순간 발그라니 달아오른다. 화장 없이도 타고난 아름다움이다. 한데, 딱한 우리 환자들의 억지스런 이야기를 좀 들어 보소. 이걸 없애야겠다는 거다. 이 매력 포인트를 없애기 위해 연기도 하고 안 그런 척도 하는 등 온갖 짓을 다한 것이다. 그리곤 끝내 병원까지 와서 이걸 없애 달라고 애원이다. 턱도 없는 소리다. 물론 환자 입장에선 적면이 불편하겠지. 하지만 그건 환자 스스로가 판 함정이다. 누구도 그런 사람을 바보 같다느니, 혹은 경멸, 무시하지도 않는다. 이건 환자의 오해일 뿐이다. 오해에서 출발한 이 호소를 들어 줄 리가 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아름답고 매력적인 적면을 없애선 안 된다. 치료란 증상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환자의 생각을 고치려는 것이다. 매력을 병으로 오해하는 그 생각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환자들은 적이 실망한다. 이걸 없애려고 왔는데! 하지만 이건 없애선 안 된다. 이 매력 포인트를 없애다니! 치료가 끝날 즈음엔 이 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도 이 점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치료는 여기서 종결이다. 없애려고 왔는데 없애선 안 된다는 걸 이해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와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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