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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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전남 해남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왔어요.
전철역인 성대앞역과 악 50미터 거리에 있는 낡은 건물의 3층에 살었는데
우리집과 성대앞역 사이에는 건물이 하나도 없는 들판이었답니다. 율전동이
지금은 많이 발전됐지만 수원의 변두리 지역 여느곳들처럼 20년 전에는 황
량하고 그야말로 바람 많고 진흙탕 많은 별볼일 없는 동네였어요. 그 감수성
여린 시기에 늘 눈에 잡힌 것은 밤에 술 마시고 싸우는 학생들의 모습과 전
철역에서 6개월에 한 명씩 사고로 사람이 죽는 것이었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특별한 이유가 없이 죽음이란 단어가 내면에 늘 맴돌았었는데, 그 시절은 사
춘기라 그랬는지 사람이 기차에 치여 신체가 많이 훼손되서 죽는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어요. 전철이나 기차가 멎어있고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던
광경이 아직도 늘 저를 따라다닙다. 그리고 또 한가지 큰 기억은 서울역
앞에 있던 종합학원에서 대입을 준비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공황증은 나를
힘겹게 하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은 가야겠고, 그때는 병명이 무언지도
몰랐었는데 하여튼 학원에서 수업을 받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허리가 아파
꼼짝도 못할 정도였어요. 긴장을 너무 한 채로 의자에 앉아서 허리가 많이
아팠던거지요. 대입을 준비한 첫해는 기간이 짧아서 포기하고 다음해에 종합반에
들어간지 얼마 안된 3월이었는데 비가 오고 날이 흐린 날이었어요. 지금도 기억하는데
연세가 많이 드신 세계사 선생님 시간이었고 3교시였는데, 갑자기 조용한 학원 복도에서
한 여학생이 엄마, 엄마 하고 비명을 지르는 거예요. 그 스산함과 불쾌함이라니.
저 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과 선생님도 그런 반응이었지요. 여학생이 정신이 이상해
져버린거였어요. 한동안 그 여학생은 계속 소리를 질렀어요. 학원 근로장학생인 남
자애들한테 끌려가기 전까지요. 저는 어떻게 세계사 시간이 끝났는지도 모르게 두려
움에 떨다가 바로 짐싸서 수원으로 내려와버렸지요. 아무래도 다음번에는 내가 저 꼴
나겠다 싶으면서 대학 안가는 것이 미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더라구요.
제가 이런 이야기들을 새삼 주절이주절이 늘어놓는 것은 요새 재앙화와 과대평가
과제를 위해서 제 내면의 광경을 조금 더 자세히 늘여다보니 너무 어둡고 부정적이고
끔찍한 사건들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더라구요. 돈이 있든, 없든. 잘났든, 못났든
작은 일에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저 자신도 힘겨운 특별
한 어느날 보다는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내일도 마찬가지인 대부분의 평범한 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며 이제는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기 보다 나쁜 일이 일어
나지 않는 보통의 날들에 감사를 하게 된 나이까지 됐는데도 아직까지 자려고 불 끄고
누워있거나 상념의 순간 순간, 내면의 시선이 매우 구체적이고 또려하게 가 있는 곳은
뉴스에나 나올법한 끔찍한 스토리와 장면이더군요. 그것이 분명 자각되면서 그순간
만큼은 매듭 하나가 스르르 풀린 기분까지 들었어요. 내가 힘들 수밖에 없구나, 싶구요. 야심한 시각에 생각나는 대로 앞뒤 안 읽으며 썼습니다. 이제 시선이 중심으로 돌아오는 연습도 해야겠군요. 일부러 좋은 것만 볼 필요는 없고 그냥 있는 대로만 보는 연습을
말이죠. 그래도 시작은 밝고 맑고 따뜻한 곳으로 눈을 향하는 것이겠죠.
댓글목록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나한님의 글을 읽으니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하고 당황스럽고 해드릴 말도 별로없고..
나와는 너무 환경이나 감성이 너무 다른 것 같아 대비가됩니다. 국민학교때 너무나 많은 호기심 때문에 전교 꼴지에서 둘째로 졸업하고, 꼴찌에서 첯번째 놈은
졸업할때까지 글을 못읽었으니 사실은 글읽을 줄아는 놈중에 제가 꼴지였지요.
우리 시골은 해남하고는 너무나 환경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96년 딸아이 대입시험 특차로 끝내고 12월 중순 전남 곳곳을 여행했는데 해남은 낮은 산들과 넓은들 곳곳에 배추와 파가 그대로 새파랗게 심겨져 있어었고 바람도 거의 봄바람 수준이고 낮에 산 남쪽 기슭에 누워보니 날씨는 내고향의 3월 수준이였습니다. 전 바람 세고 겨울이면 강모래가
토내이도 처럼 날아오르는 낙동강가에 살았습니다. 우리시골에사는 새, 동물, 물고기, 토끼, 닭, 오리, 개, 염소, 너구리, 족제비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서 껍질벗기고 바위틈으로 들어가는 구렁이를 잡고 동생두과 잡아댕겨 두 동강을 내고
동내애세 연애하던 총각이 처녀집의 반대로 강가의 밤나무 숲에서 목메달아 죽었다기에 제일먼저 달려가 혀빼물고 죽은 놈의 발가락을 만져보고, 강가에서 화장한다기에 어른들이 아이들은 가라고 야단을 치는데도 좀더 가까이서 볼려고 발버둥치고, 동네 사람죽어 묻는데는 꼽싸리끼여 그 지독한냄새를 맡아봐야 직성이 풀리고, 우리 동네에서 제일높으다는 나무들은 다 기어올라가보고, 어른 들
이 밤에 떠든다고 잡으로 오면 공동묘지로 도망가고 5월부터 9월까지는 낙동강을 매일 헤엄쳐 한번 건너갔다 오지않으면 직성이 안풀리고 이게 전부 국민학교때의 추억이요. 중하교 1학녀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는 어뜬든놈을 붙들고 주먹질을 해도 매일 한판씩 안하면 밥맛이 없엇는데.. 공황은 나한님같은 사람에게 간것은 이해가가는데 지같은 놈에게 온건 이해가 않가요. 아마도 정신병원에서 탈출한놈미 아닌가 싶네요. 얌전한 놈이던 미친놈이던 다 두들겨 잡아야 할텐데.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공황은 사람 가리지 않고 옵니다. 상관없습니다. 고치면 됩니다.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나를 확인해 가는 과정이 공황을 치료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황은 삶의 계기에 따라서 올 수도 있고, 않올 수도 있었던 그런 병인것 같습니다.
저도 문득, 노량과 용산으로 입시학원을 다녔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