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클리닉자조모임

나의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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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1-04-05 12:00 조회111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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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이 오기 전 나를 돌이켜보면
난 참 나에 대해 많은 걸 숨기고 살아왔었다.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난 참..가난한 우리집이 싫어서..
못 배운 부모님이 싫어서..
형제 많은 가족들이 싫어서..
내 환경을 원망하고..부모님과 가족들을 
맘속 깊이 무시했었다..
친구들앞에서는 적당히 나를 속이고..
그렇게 내자신까지 속이며 살았었다..
그렇게 속이고 잘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난 맘속으로 늘상 죄책감을 느끼면서
괴로워했고..내 기준에 못미치는 환경이
부끄러워 전전긍긍했었다..

공황을 맞고 나서보니..
난 참..이 공황을 맞을려고
벌써 16년전부터 차근 차근 준비해왔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나의 고장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것은 자신감도 아니요..불안 극복도 아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에는 누군가를 붙잡고 내 속에 들어 있는 찌꺼기들을 
말로 토설하고 실컷 울고 나서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나의 너무나 개인적인 얘기지만..
털어놓을 곳이 여기라는 생각에 이렇게 글을 쓴다...
쓰고 나서도 후회하지 않으련다..
난 이제 모든 것에 직면하고 살기로 맘을 먹었으니..

오늘은 운동을 하면서 아버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13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난 참 생전에 아버지에게 제대로 한번 잘해본적
없는 딸이었다..
아버지가 뱃사람이었다라는게 부끄러워..
남편한테조차..아버지 생전의 직업에 대해 여지것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었다..
단지 그게 부끄러웠다...아버지가 뱃사람이었다는게..
그게 아버지가 원했던 일이었을까..그 환경에서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는지를..
지금에야 정말 절절히 느껴져왔다...
나는 자랑스러운 뱃사람의 딸이라고 맘속으로 외치자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는지..운동하다
눈물,,콧물 쏟으며..돌아와야했다... 
이 글을 쓰다보니 지금도 눈물난다...

아버지..정말 사랑하고 감사합니다..이 못난 딸..
증말 제대로 사람 함 되볼께요..지켜봐주세요 

댓글목록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고해성사라뇨...올리신 글들을 보건데 북걸님 참 멋있는 분이신걸요..
누구나 30이 넘고 부모가 되어봐야 깨달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겠어요...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참 부족한 존재같아요...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창 밖 가을 풍경이 점점 짙어갑니다. 고향 생각, 부모 생각이 새로워질 때입니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지면... 이 노래 아시는가 모르겠네요.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너무 자책하시지 마세요... 누구나 자기 환경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힘네세요^^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어린시절 가난하게 지낸 분들이 철들기전에 북걸님과 같은 생각을 많이 하였을 것 입니다. 저도 국민학교때 수업료를 돈으로 내지 못해 살자루를 이고 학교에 오신 어머니를 보고 너무 챙피해서 화장실에 숨어버린 일이있습니다. 다른 신식어머니들이 파마를 하고 다녔는데 저의 어머니는 비녀머리를 하고 다니셨고 저의 도시락은 항상 날 된장에 풋고추 몇개설어 비벼넣어 주셨습니다. 저는 너무 챙피해서 항상 나홀로 학교뒷산에 올라가 소나무 뒤에 숨어서 밥을 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양은 도시락이 누나 형이 쓰던것이라 군데군데 곰보처럼 빵구가나 다른 반찬을 넣으면 국물이 새기 때문이였지요. 국민학교 졸업할때까지 소풍때 돈한푼 안주신 어머니. 시장에서 다른 아이들은 엄마 만나면 사탕얻어먹고 했는데 우리 어머니는 시장에 만나도 한번도 저에게 빵이나 사탕을 사주신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깜둥 고무신을 벗어난건 중하교 입학때였습니다.
옷은 항상 형님이 입던것 아니면 이모집 형이 입던 것을 얻어 입었고 새옷라곤 중학교교복 고등학교교복 대학교복 이외는 입어본적이없고 콜라 사이다는 결혼전 모두 마신게 열병이하 물론 내돈내고 사마신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결혼하고 제 아네가 사이다 콜라를 잘 사마시길래 희한한 여자네 저쓸데 없는 것을 왜 돈주고 사먹을까.머리가 어떻게 된 여자 아닐까? 정도로 생각했고.
그래서 저는 군대에가 있을 때도 한번도 어머니를 보고싶다는 생각이든적이 없었습니다. 제대하고 대학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 진학해서 졸업할때쯤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해보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모두 9남매인데
아들 다섯은 어떤일이 있어도 대학까지 시킨다는게 어머니의 목표이셨고 그목표를 달성하기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오신 것을 알았을때 철이든 내가 눈물이 나지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형님대학졸업식때 아버지 어머니가 대학구경을 하시지못했기 때문에 제가 석사학위 받을때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당신들께서 그렇게 시키지고했던 대학꼬라지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한번 보시라고.
결혼하고 한20년 지나서 용인 민속촌을 간일이 있었습니다. 비록 어머님이 국민학교를 안 나오셨어도 국문정도는 깨우치신 건 알고 있었느데 한문으로된 현판들과 기둥에 쓰여진 한문들을 줄줄 읽으시며 해설까지하시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서당 문 앞에도 안가보셨다는데. 저는 국민학교 졸업할때 전교 꼴찌에서 두번째로 졸업했지만, 형님 누나들이 전부 국민학교를 전교 일등으로 졸업하고 총명한 생질들이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줄줄이 받은 이유를 그때 알았습니다.올해 울어머니는 91세 이신데 정신이 초롱 초롱 하셔 좀느리긴하시지만 지금도 보름에 소설한권씩은 꼭읽으십니다. 비록 위대한 부모님을 가지신분이 북걸님과 저뿐이겠습니까?
해방, 6.26를 거치며 이정도까지 우리를 있게한 우리부모 형님 세대에 무한한 감사를 하고 우리들 후배에게 부끄럽지않은 선배가 되도록 노력해야지요.북걸님도 아버님 생각을 하시면 눈물도나고 아~ 우리아버지 정말위대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드실거예요. 공황을 호도열매만하게 만들어 만지고노시고요. 댁대 두루 행운이 깃들길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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